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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산

디지털 유산으로 남겨진 의료정보, 프라이버시와 상속 사이의 법적 쟁점은?

디지털 시대의 유산 개념은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과거에는 유산이라고 하면 물리적인 재산이나 문서만을 떠올렸지만, 오늘날에는 이메일, 사진, SNS 기록, 심지어 게임 아이템까지 디지털 유산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민감하면서도 잘 다뤄지지 않은 한 영역이 있다. 바로 의료정보다.

 

환자의 건강기록, 진단서, 치료이력, 유전자 정보, 심리상담 기록은 모두 고도의 민감성을 지닌 개인 정보이며, 동시에 사망 이후 남겨지는 디지털 데이터이기도 하다. 가족들은 이 정보에 접근함으로써 질병의 유전력이나 상속과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고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망한 사람의 의료정보는 누구의 소유이며, 누구에게 열람권이 있는가? 보호해야 할 프라이버시와 알아야 할 상속인의 권리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하는가?

 

이 글에서는 디지털 유산으로 남겨진 의료정보가 갖는 법적 지위와 그에 따른 사회적, 윤리적, 실무적 쟁점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디지털 유산으로 남겨진 의료정보, 프라이버시와 상속 사이의 법적 쟁점

 

의료정보는 디지털 유산인가? – 정보의 성격과 법적 위치

의료정보는 본래 진료 과정에서 의료기관과 환자 간에 생성되는 민감 정보다. 진단, 치료 이력, 병력, 수술 기록, 심리상담 내용, 영상자료, 처방전 등은 대부분 의료법상 ‘개인 건강 정보’로 보호된다. 문제는 환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이 정보들이 디지털 형태로 의료기관 또는 클라우드 시스템에 저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고인의 의료정보는 물리적 문서가 아닌 디지털 유산의 한 형태가 된다.

 

그러나 의료정보는 상속 가능한 자산으로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 민법상 상속은 재산권에 한정되며, 개인정보나 신체정보는 원칙적으로 상속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의료정보는 상속인이 마음대로 열람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유산’이 아니다. 반면, 유전자 질환이나 정신질환 이력 등은 유족의 건강관리나 보험, 혼인 등 실생활과 직결될 수 있다. 이런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면 상속인들은 중요한 의학적·법적 판단을 내릴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사망자의 정보 보호 권리와 유족의 알 권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의료정보는 디지털 유산인 동시에 고도의 프라이버시를 내포한 예외적 자산으로 간주된다.

 

법적으로 사망자의 의료정보는 누가 접근할 수 있는가?

한국에서 사망자의 의료기록 열람은 의료법 제21조에 의해 제한된다. 해당 법조문에 따르면,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는 의료기록을 제3자가 열람할 수 없다. 다만, 예외적으로 유족이 아래 요건을 갖춘 경우에는 열람이 가능하다.

  1. 배우자, 직계존비속 등 법적 상속인이어야 함
  2. 사망자의 진료기록 열람이 ‘정당한 사유’에 부합해야 함
  3. 열람 신청 시 신분 증명 및 관계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함
  4. 유족 간의 의견 불일치나 민원 등이 없을 것

이 외에도 병원마다 자체 규정이나 지침이 있어, 통상적으로 진단서나 사망진단서 열람은 가능하나, 구체적인 정신과 상담 기록이나 유전자 검사 결과 등 민감한 정보는 열람을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2021년 헌법재판소는 “사망자의 개인정보도 일정 기간 동안 헌법상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는 프라이버시의 사후 연장을 인정한 첫 사례로, 사망자의 정보 주권이 살아 있는 사람의 상속권보다 우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법적으로는 유족의 권리와 사망자의 프라이버시 간에 ‘합리적 조율’이 필요하다는 해석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의료정보 유산화의 쟁점: 프라이버시, 상속, 그리고 기술적 문제

사망자의 의료정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회적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디지털 유산으로서의 의료정보는 일반적인 상속 자산과 달리 다음과 같은 특수성을 지닌다.

 

프라이버시 보호와 정보 주권의 지속성

생전의 프라이버시는 사망과 함께 사라지는가? 현대 사회에서는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인격적 권리로 간주되며, 사후에도 일정 기간 보호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는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법 해석에 영향을 주며, 유족의 열람 요청이 무조건 허용되지 않는 근거가 된다.

 

상속인의 알 권리와 유전적 건강 정보의 활용

유족이 암, 희귀 질환, 정신질환 등 유전 가능한 질환 이력을 알지 못하면, 본인의 건강관리나 자녀의 질병 예방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유전병 정보는 실질적인 의료 자산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진료기록이 곧 ‘미래의 건강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의료정보의 기술적 보존과 폐기 기준 미비

의료정보는 대부분 병원 전산시스템 또는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되며, 일정 기간 후에는 폐기된다. 그러나 폐기 기준과 절차가 병원마다 달라, 유족이 요청했을 때 이미 삭제된 경우도 있다. 디지털 유산으로서 의료정보의 장기 보존 기준이 법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정신과·심리상담 기록의 민감성

특히 정신과 기록이나 심리상담 기록은 생전에도 민감하게 다뤄지며, 사망 후에는 유족 간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사망자가 생전에 극도로 사적인 감정을 기록해 놓은 경우, 열람은 고인의 사생활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

 

해외 플랫폼 및 헬스케어 앱에 저장된 데이터 문제

애플 헬스케어, 구글 피트니스, 유전자 분석 앱(예: 23andMe) 등에 저장된 건강정보는 대부분 해외 서버에 보관되며, 국내법 적용이 쉽지 않다. 이런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요청이나 외교 채널을 통한 공식 절차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의료정보는 유산인가 비공개 자산인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디지털 유산 시대의 도래는 인간의 정보와 존재의 경계를 다시 묻게 만든다. 특히 의료정보는 그 민감성과 중요성에서,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인의 건강정보는 때로는 유족의 생존과 직접 연결되는 실질적 자산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의료정보는 개인의 가장 사적인 기록이며, 고인의 존엄과 인격을 상징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료정보를 디지털 유산으로 볼 것인지, 또는 사망 이후에도 보호되어야 할 절대적인 프라이버시로 볼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단순한 법 조항이나 병원 규정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윤리적 기준과 문화적 인식의 변화가 함께 따라야 한다.

 

부모, 자녀, 형제자매 같은 가까운 유족일지라도, 사망자의 민감한 정보에 접근하려면 사전 동의 또는 법적 절차를 거치는 방식이 정착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의료기관은 디지털 유산 시대에 맞는 기록 보존 정책과 열람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사람의 생애는 단지 물리적 재산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의료정보 또한 기억과 권리의 일부로 존중되어야 하며, 남은 이들이 정보에 접근할 때는 존엄과 신중함이 동반되어야 한다.